포도원 주인의 사랑 (Love of the Owner of the Vineyard)

Pastor Jihyun D. Yi, Feb 15, 2015

누가복음 20:9-16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3)

 주인이 머슴

19 세기 중반 영국의 여류 작가가 쓴 한 소설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크셔 지방에서 농장을 경영하는 언쇼 (Earnshaw) 씨에게는 힌들리 (Hindley) 라는 14 살 된 아들과 캐서린 (Catherine)이라는 6 살 된 딸이 있습니다. 언쇼 씨는 일을 보러 삼 일 길을 걸어 리버풀에 나갔다가 아이 하나가 버려져 굶어 죽어가고 있는 것을 봅니다. 예닐곱 살 된 집시 소년입니다. 도저히 그냥 버려둘 수 없어 아이를 안고 60 마일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언쇼 씨는 몇 년 전에 죽은 아들의 이름인 ‘히스클리프 (Heathcliff)’를 그 아이에게 주고 아들처럼 키웁니다. 집시 출신답게 히스클리프에게는 거친 면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쇼 씨는 그 아이를 총애하며 그 아이가 하는 말을 다 믿어 줍니다. 언쇼 씨의 친아들 힌들리는 갑자기 굴러 들어온 히스클리프를 싫어합니다. 반면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잘 어울립니다. 여러 해가 흘러 후 언쇼 씨가 죽자 아버지를 이어 집안의 주인이 된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하인으로 취급하며 학대하기 시작합니다. 히스클리프는 캐서린을 깊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를 버리고 집안이 좋은 한 청년의 청혼을 받아들이자 히스클리프는 어디론가 훌쩍 떠납니다. 몇 년 후 부유한 신사가 되어 돌아온 히스클리프는 복수를 시작합니다. 먼저 아내가 죽은 후 거의 폐인이 되어 있는 힌들러를 도박판으로 유인하여 땅 문서를 하나씩 털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히스클리프는 농장을 자기 손에 넣습니다. 이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힌들러는 알코올 중독으로 죽고 그의 어린 아들 헤어턴은 고아가 됩니다. 농장의 주인이 된 히스클리프는 헤어턴이 교육을 받지 못하게 하고 무식한 머슴으로 자라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에밀리 브론테 (Emily Brontë)의 유명한 소설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의 일부입니다. 히스클리프가 죽음으로 내몬 힌들리가 누구입니까? 그의 생명을 구해주고 아들처럼 길러 준 언쇼 씨의 친아들입니다. 그가 무식한 머슴이로 키운 헤어턴이 누구입니까? 언쇼 시의 친손자입니다. 농장 주인 언쇼 씨가 아니었다면 히스클리프는 리버풀의 길거리에서 오래 전에 굶어죽었을 것입니다. 그가 언쇼 씨에게 받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힌들리나 헤어턴을 그렇게 잔인하게 다루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클리프는 자신이 처음부터 농장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게 복수하는데 집착하고, 자신이 사랑했으나 빼앗긴 캐서린에게 광적으로 집착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히스클리프는 이와같이 거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히스클리프를 닮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주인이 농부들

예수님은 성전에 모인 백성에게 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비유에도 히스클리프를 닮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주님의 비유를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땅에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이사야 5:1-1-2를 참조하면 포도원 주인은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도 세웠습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포도원을 어떤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그는 타국으로 갔습니다. 이 농부들은 소작인들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어야 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그들은 특별한 포도원 주인을 만났습니다. 그 후한 주인 덕분에 극상품 포도가 심겨져 있고 최신 시설이 갖추어진 포도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을 신뢰했기에 농장을 온전히 그들에게 맡기고 타국으로 갔습니다. 농부들은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며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넉넉한 소출을 거둘 것이며, 그 가운데 일부만 주인에게 드리면 됩니다. 농부들은 행운아들이요, 주인에게 대단히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처음에 농부들은 주인에 대한 감사가 충만한 채 일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 포도를 거두는 때가 되었습니다. 주인은 소출 가운데 일부를 받아 가기 위하여 농부들에게 종을 한 사람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0b) 이에 주인은 다시 다른 종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빈손으로 돌려 보냈습니다. 주인은 다시 세 번째 종을 보냈습니다. 농부들은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았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에게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요? 한 해 동안 땀흘리며 수고해서 맺은 열매의 일부를 주인에게 드리는 것이 그렇게 아까웠을까요? 그들이 열매에 욕심을 낸 것을 분명합니다. 하지만 농부들이 더 많은 열매를 자기들의 주머니에 넣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주인에게 소작료를 바쳤을 것입니다. 그래야 그 농장에서 계속 일할 수 있지요. 그런데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이 왔을 때 소작료를 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를 때렸습니다. 심지어 능욕하였습니다. 농부들은 자신들이 마치 농장의 주인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나아가 본래 주인과 그 종들은 부당하게 자신들의 소출을 빼앗가 가고자 하는 불한당쯤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인은 왜 농부들에게서 소출의 일부를 받고자 할까요? 만일 포도원 주인이 일반 지주들과 같이 수익에만 관심이 있다면 농부들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소작료를 받으러 간 종이 얻어 맞고 빈손으로 돌아왔을 때 즉시 이렇게 통보했을 것입니다. “임대 계약이 파기되었으니 X월 X 일까지 농장을 비우시오. 밀린 소작료를 그때까지 납부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대응하겠소.” 그런데 주인은 반복해서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소작료를 받고자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소작료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의 관심은 어디에 있을까요? 농부들은 농장에서 큰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출의 많은 부분 또한 그들에게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농부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은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라는 사실입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그들을 불러서 멋진 포도원에서 일하게 해 주신 주인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매번 거둔 수확에서 일부를 주인에게 드릴 때 농부들은 이와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드림으로써 농부들은 주인과 바른 관계를 맺고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것은 농부들과의 ‘신뢰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를 잘 유지할 때 농부들은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시험에 빠졌습니다. 주인을 잊어버렸습니다. 관계는 깨어졌습니다. 주인을 적대시합니다. 주인의 마음이 얼마나 상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어떻게 해서라도 농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합니다. 마침내 주인은 마지막 방법을 사용합니다. “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3) 여기서 우리는 주인이 일반적인 사람과는 전혀 다른 몇 가지 면모를 가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주인은 끝까지 농부들을 믿어 주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이미 주인을 배신했고, 농장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주인의 메신저들을 여러 차례 능욕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더 이상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을 믿는 것은 무모해 보입니다.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주인은 농부들의 정신이 차리고 돌이킬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농부들은 그럴 사람들이 아니냐. 내 아들을 보면 내 진심을 알고 마음을 돌이킬 거야.” 이와같은 믿음을 가지고 주인은 당신의 아들을 농부들에게 보냈던 것입니다.

둘째, 주인은 농부들을 사랑합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보낸 종들을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마 21:35). 이러한 포악한 농부들에게 아들을 보내는 것은 너무나 위험합니다. 주인은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들을 희생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농부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원합니다. 파멸로 치닫고 있는 농부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아들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가끔 자녀 문제로 고민하는 부모님들을 상담합니다. 지금은 한국에 계신 한 여집사님은 자녀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다가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제 아이들을 위해 제가 죽어야 한다면 그럴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제 아이들을 향하여서는 그런 사랑이 솟아나네요.” 정상적인 부모님들을 그 자녀들을 향하여 모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목숨이라도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이 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부모님은 그 자녀를 죽는 데에 내어 주지 못합니다.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지 어떻게 자녀의 목숨을 내어 주겠습니까?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농장 주인이 하겠다고 합니다. 그는 농부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이하고 높은 사랑입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인정하고 존대하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비극이 일어나고야 말았습니다. “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14-15a) 농부들은 끝까지 주인이 내민 손을 잡지 않았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거부하였고, 주인을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5b-16)

 주인이 사람들

좁은 의미에서 농부들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을 지칭합니다. 나아가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전체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극상품 포도를 맺을 수 있는 포도원을 만들어 그들에게 맡겨주셨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감사가 충만하여 이 포도원을 가꾸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를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차례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였으나 그들은 듣기를 거부하였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을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어 그들을 설득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를 죽였지요. 보다 넓은 의미에서 농부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모든 세상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과 시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햇빛과 공기와 물과 같이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재능과 창의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하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 사람은 폭풍의 언덕에 나오는 히스클리프와 유사한 삶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는 주인 언쇼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농장의 주인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늘 무엇엔가에 집착하며 부자유한 삶을 살다가 쓸쓸히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히스클리프와 같이 거칠게 당신을 거부하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기 원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교만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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