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몸 (The Resurrection Body)

Pastor Jihyun D. Yi,  March 29, 2015

고린도전서 15:21-49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58)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는 부활의 가치를 바로 알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인 인류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22a)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때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당신의 법대로 다루셔야 했고 그에게 죽음을 형벌로 주셨지요. 이후로 아담의 후손들, 곧 온 인류는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죽는 이유가 100 % 아담의 죄 때문만은 아니지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죄 때문에도 죽음의 형벌을 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롬 3:10-19, 6:23).

사람들은 자신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을 먼 미래의 일로 여깁니다. 아직은 시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끊임없이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십니다. 사람은 자신이 죽음을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바로 인식할 때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기 때문이지요. 아담의 후예들, 곧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지난 3월 24 일 저먼윙스 여객기의 추락은 참으로 가슴 아픈 사고였습니다. 정상 항로를 따라 아름다운 알프스로 다가가던 비행기가 갑자기 급하강하여 시속 700 km 의 속도로 알프스의 한 자락을 들이받았습니다. 150 명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뛰어난 항공 기계 기술을 보유하고 있고 철두철미하게 원칙을 지키는 독일 항공사가 고장이나 실수로 사고를 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종사의 정신적인 결함까지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번 사고는 죽음이 우리에게 매우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죽습니다. 죽음이 끝이라면 인생은 얼마나 허무합니까.

죽음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인생관들은 대동소이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을 바울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2b) 어떤 사람들은 원색적으로 이 인생관을 따릅니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고 일도 열심히 하지 않으며 쾌락을 찾아 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고상하게 이 인생관을 따릅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학위를 받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며 자기 분야에서 열정을 가지고 일합니다. 이들은 살아 있는 동안 인생을 즐기되 의미있고 멋지게 즐기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동일하게 허무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음 이후에 대해 어떠한 실제적인 희망도 갖지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믿을 수 없을만큼 놀라운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2) 아담과 우리 자신의 죄로 인하여 우리 인생 길은 죽음이라는 절벽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절벽 위로 새로운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죽음을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는 세상의 인생관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에게 따르라고 권면했던 바로 그 성경적인 인생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33-34) 우리는 속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깨어 의를 행해야 합니다. 죄와 싸워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죽음을 이길 수 있는 비밀을 알게 된 바울은 열정적으로 이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전하였습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0-31) 당시 로마 제국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날마다 죽을 각오를 해야 할 만큼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장차 얻게 될 부활에 대한 확신이 바울에게 비범한 용기와 열정을 준 것이지요.

새로운 

당시 철학이 발달하였던 그리스에서는 영혼불멸을 믿는 이들이 있었지만 “몸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유대교에서도 몸의 부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 어느 누구도 “몸의 부활”을 구체적으로 생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서 썩지 않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분은 몸을 가진 채 부활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신자들도 장차 부활의 새 몸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것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35a) 이에 바울은 현재 우리의 몸과 장차 받을 부활의 몸의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36-38) 현재 우리의 몸이 씨라면 부활의 몸은 그 씨에서 나올 나무와 같습니다.

어떠한 사과나무도 본적이 없고 사과 조차 본적이 없는 사람이 사과 씨만 보고 사과나무의 모양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하얀색과 분홍색으로 이루어진 사과 꽃의 우아한 자태, 수백 개의 가지들이 어우러진 늠름한 사과 나무의 모습, 초가을 햇볕에 익어가는 빨간색에 사과 열매들, 그 싱그러운 향기와 달콤하면서도 새콤한 맛, 이 모든 것 가운데 한가지도 제대로 예측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몸이 사과 씨라면 장차 받게 될 부활의 몸은 늠름한 사과나무와 같을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환경과 기능에 맞게 다양한 형태의 몸들을 만드셨지요.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39) 사람과 포유류와 새와 물고기는 판이하게 서로 다른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의 몸은 하늘에서 나는 데 적합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새들의 몸을 감싸고 있는 깃털만 살펴보아도 알 수 있는 사실입나다. 깃털은 대단히 정교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깃털은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먼저 깃털은 비행에 필수적인 조직입니다. 체온을 보호하는 것도 깃털이지요. 철새인 캐나다 구스 (캐나다 기러기) 들은 이동할 때 수 km 의 고공에서 비행하지요. 그러니 영하 40 도에 가까운 차가운 바람을 견디지 못하면 얼어 죽습니다. 다행히 캐나다 구스들은 “캐나다 구스®”를 입고 있습니다. 깃털은 방수가 됩니다. 그러니 비가 와도 문제가 없지요. 또한 깃털은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어 새들의 맵씨를 낼 수 있게 해 줍니다. 깃털이 없다면 새들의 모습이 얼마나 이상하겠습니까. 이와같이 창조주 하나님은 새에게는 새의 몸을 물고기에게는 물고기의 몸을 짐승에게는 짐승의 몸을 사람에게는 사람의 몸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 하나가 모두 자신에게 꼭 맞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몸입니다. 이 하나님은 부활의 때에 천국에 알맞은 새 몸을 설계하셔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바울이 우리에게 전해 주는 장차 받게 될 부활의 몸에 대한 정보가 어떠합니까?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42-44) 현재 우리의 몸도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몸입니다. 하지만 이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는 몸은 약합니다. 다치고 상하기도 하며 병들기도 하며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점차 힘을 잃어갑니다. 결국은 죽고 썩게 될 몸이지요. 또한 우리의 몸은 욕된 모습을 안고 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며, 기도해야 할 때 졸기를 잘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는 썩지 아니하며 영광스러우며 강하며 신령한 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생각할수록 대단히 크고 영광스러운 선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같이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울이 권면한대로 깨어 의를 행하며 죄와 싸워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예수님의 제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한 사람

1685 년 독일 할레 (Halle)의 한 신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태어난 헨델 (Georg Frederic Handel) 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습니다. 28 세에 영국으로 이주한 그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명성을 얻었습니다.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으나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변덕이 심한 청중들의 비위를 맞추기는 쉽지 않았고, 이미 자리를 잡고 있던 영국 작곡가들과 경쟁도 그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헨델은 계속되는 재정 적자를 회복하려고 애쓰다가 건강이 나빠졌고 1741년에는 빚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나이는 벌써 56세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것 같았습니다. 그때 두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있는 한 자선 음악 단체가 그에게 오라토리오를 작곡해 달라고 의뢰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의 친구 찰스 제넨스 (Charles Jennens) 헨덴에게 오라토리오의 대본을 하나 써 주었습니다.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성경에 충실하게 표현한 대본이었데 특이하게도 모든 가사를 킹 제임스 성경에서 인용한 말씀으로 구성하였습니다. 헨델은 런던의 부룩스 거리에 있는 작은 집에서 작곡을 시작하였습니다. 자기 방을 떠나지 않고 심지어 식사까지 거의 하지 않으면서 작곡에 몰두하였습니다. 단 24일만에 260 페이지 분량의54 곡으로 구성된 오라토리오를 완성했습니다. 그는 그곡에다 “메시아”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헨델이 작곡을 하는 동안 방문했던 한 친구는 그가 감격에 벅차서 눈물을 흘리며 작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헨델은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곡을 쓴 것입니다. 1743 년 런던에서 이 곡이 연주되었을 때 영국 국왕도 참석했습니다. 2부의 마지막 합창 “할렐루야”가 시작되자 국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왕실의 의례에 따라 모든 청중들이 일어섰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할렐루야 합창을 들을 때 청중들이 일어나는 전통은 오늘날까지 200 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습니다. 메시야는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헨델은 메시야 연주회 수익의 대부분을 병원 건립 등 자선을 위해 기부하였습니다. 어떤 전기 작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헨델의 메시아는 많은 주린 사람들을 먹였고, 헐벗은 사람들을 입혔고, 고아들을 돌보았다. 어떤 나라의 어떤 음악 프로덕션 보다도 더 많이 이런 자선사업을 행하였다”. 메시아는 듣는이들에게 신비로운 영적 영향을 끼쳐왔습니다. 다른 작가는 “메시아의 음악과 메시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우리 주위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확신을 신학자들의 어떤 책들보다도 더 분명하게 갖게 하여 주었다고”고 기록하였습니다. 1759 년 부활절 하루 전날 헨델은 세상을 떠나 주님 품에 안겼습니다. [1]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 있는 헨델의 묘지에는 메시아의 악보를 들고 있는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악보는 바로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I know that my Redeemer liveth)” 의 첫 부분입니다. 메시아의 제3부 “메시야의 부활과 신자들의 영생”의 첫 곡 제목이지요.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욥기 19:25-27)

[1] Patrick Kavanaugh, Spiritual Lives of the Great Composers, Zondervan,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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