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 그리고 사면 (A Stone and A Par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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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FM Sunday worship message, October 3, 2010 (translated from English)

돌 하나 그리고 사면 (A Stone and A Pardon)

요한복음 7:53-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11)
요한복음 7 장과 8 장 사이에는 열두 절로 된 짧은 길이이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을만한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때는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기간 중었습니다. 여느 때와같이 예수님은 그 날도 새벽부터 성전에 오셔서 백성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2). 요란한 광고 없이도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은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런데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웅성거리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성전으로 들이닥칩니다. 3 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그들은 성경을 필사하는 책임을 맡은 서기관들과 하나님의 법을 소상히 알고 철저히 지키는 것으로 소문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한 여인을 끌고왔다는 것입니다.
삽시간에 예수님의 설교는 중단되었고, 사람들의 시선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옮아갑니다. 그들은 지체없이 예수님에게 이렇게 도전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4-5) 모세의 율법, 곧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법에 따르면 간음죄는 사형으로 징계해야 합니다.
이제 성전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한가운데 세워진 문제의 여인에게로 집중됩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간음죄로 한 여인을 고소하기 위해서는 두 명의 증인이 현장을 목격하고 동일한 증언을 해야 했습니다. 성전으로 끌려와 자신을 고소하는 자들에게 한 마디 변명도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 여인은 핑게의 여지 없이 범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에서 ‘간음’이 무엇인지 소상히 밝히시며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말씀하십니다. “남자가 다른 남자의 아내 곧 자기의 이웃집 아내와 간통하면, 간음한 두 남녀는 함께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 (레위기 20:10, 새번역)
하나님의 법을 요약한 십계명도 “간음하지 말지니라.” (출애굽기 20:14) 라고 분명히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간음죄를 엄하게 다루실까요? 무엇보다도 이 죄는 가장 사랑하고 신뢰하는 인간관계를 깨기 때문입니다. 간음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이처럼 무서운 결과가 따라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여인은 어쩌다가 이런 죄를 범하였을까요? 이 여인의이름이 무엇인지, 또한 어떤 경로를 통해 그녀가 이런 무서운 죄에 빠지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간음죄의 시작점이 바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보다 근본적인 죄 (롬 1:28)’ 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28에 따르면 인간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했을 때 마음이 어두워졌고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 대신에 온갖 우상을 그 마음에 품게 되었고 결국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빠져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무엇을 해도 그 영혼에 만족이 없습니다. 결국 간음은 인간이 가진 영혼의 목마름과 깊은 관련이 있는 죄입니다.
인간은 본래 창조주인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것을 더 사랑할 때 이것을 ‘영적 간음’이라고 합니다. 오랜 시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문제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들의 타락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어찌 너를 용서하겠느냐? 네 자녀가 나를 버리고 신(gods)이 아닌 것들로 맹세하였으며 내가 그들을 배불리 먹인즉 그들이 간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 (렘 3:1-2a)
영적인 간음은 육적인 간음과 마찬가지로 심각한 죄입니다. 육적인 간음은 영적인 간음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육적인 간음에는 민감하지만 영적인 간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겉으로 볼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자 하는 열정에 불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간음한 여인을 엄히 다스려 하나님을 법을 세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이 여인을 잡아온 이유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다시 5 절을 보실까요.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5)
그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묻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6a) 그들의 목적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려 고소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새벽부터 미끼로 쓸 이 여인을 잡아 성전으로 온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라는 인물을 제거하는 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는데 온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으며 추악한 욕심으로 가득합니다 (8:44 참조). 그들은 모두 영적 간음자들입니다. 그들이 한 여인을 고소하고 있지만 실상인즉 그들 스스로를 영적 간음자로 고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지만 묵묵히 땅에 앉아 손가락으로 무언을 쓰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재촉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7)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히시고 땅에 무엇을 쓰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돌로 치라!” 하셨습니다. 이는 간음 죄의 댓가가 사형임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법을 엄격히 존중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9) 부정한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한마디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7) 무리 중 한 사람이 먼저 조용히 자리를 뜹니다. 그의 뒤를 이어 한 사람, 또 한 사람, 결국 모든 사람들이 성전을 떠납니다.
이제 여인 앞에는 오직 한 분이 계십니다. 비록 누추한 옷을 입으셨으나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분은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유일한 재판장이십니다 (요 5:22). 예수님은 여인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꿰뚫어 보시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녀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분께서 조용히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0b)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11a) 이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1b)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는 우주의 주인이요 재판장께서 이 여인에게 내린 사면 선포입니다. 여인은 용서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돌로 치라.” 하시므로 여인의 죄가 죽어 마땅한 무서운 죄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커다란 죄를 범한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1998 년 미국인들은 카알라 페이 터커 (Karla Faye Tucker) 라는 한 여성 범죄자를 용서하고 사면할 것인가? 아니면 법대로 사형을 집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큰 논쟁에 휘말렸습니다.
1983년 당시 23 살이던 카알라는 마약에 취한 상태에서 남자 친구와 함께 텍사스 휴스톤에서 오토바이를 훔치기 위해 한 아파트에 침입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젊은 커플을 망치와 곡괭이로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수감되었어도 카알라는 덤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루함을 달래려 참석한 예배에서 그녀는 성경을 한 권 훔쳐 자기 방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날 밤, 카알라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 당시 일어난 일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제가 주님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제가 저질렀던 일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이었는지 깨달아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4 년 동안 그녀는 향기나는 크리스찬으로 살았습니다. 카알라는 언제나 자신이 흉악한 죄인이었음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용서를 인해 늘 기쁨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1995 년에는 다나 브라운이라는 교도소 사역을 하는 한 목사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녀의 사형집행 날짜는 점점 다가왔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많은 크리스찬들이 그녀의 사면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14 년 동안의 삶은 그녀가 새 사람이 되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텍사스 정부는 1998 년 2월 예정대로 사형을 집행했습니다. 마지막 남긴 말에서 카알라는 피해자 가족들에게 다시 한 번 깊이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평안히 예수님 품에 안겼습니다.
카알라 사건은 사형제도의 찬반에 대해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보다 중요한 한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용서받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것입니다. 비록 사람이 만들었지만 텍사스 주의 법도 법입니다. 이 법을 어긴 사람을 함부로 사면할 수 없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법을 어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19) 하나님의 법대로 하면 우리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카알라와 같은 흉악범을 대할 때 사람들은 그를 “저 짐승과 같은 OO” 라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이는 그가 우발적으로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본질이 악해서 구제불능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우리를 죄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죄를 범한다고 알려줍니다. 간음, 살인, 거짓말, 미움과 같은 죄들은 모두 이런 본질적으로 악한 본성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벌레요, 짐승이요, 하나님의 원수라는 거친 표현까지 쓰고 있습니다 (사 41:14; 롬 5:10).
이날 새벽 성전에서 한 여인의 간음죄가 공개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종교지도자들의 간음보다도 더 악한 욕망의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곳에 있던 모든이들이 결코 다른이에게 돌을 던질 수 없는 죄인들이요, 벌레요, 하나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사랑과 용서’로서 다루셨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씻기 위해 오랜 세월 동안 양의 피가 뿌려진 그 성전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피를 담보로 그 여인과 모든 무리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1b)
이 사랑과 용서만이 한 죄인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벌레요, 하나님의 원수인 우리들을 고귀하고 겸손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1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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