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No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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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FM Sunday worship message, October 17, 2010 (translated from English)

다시는 (No More)

요한복음 7:53-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11)

타이거 우즈는 골프의 황제였을 뿐 아니라 흑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는 타고난 천재성만 의지하지 않으며 꾸준한 연습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세계최고의 골프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런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골프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품위와 정직입니다.” 그러나 지난해 그의 불륜이 드러났습니다. 아름다운 아내와 어린 두 아이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열 명이 넘는 여인들과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여성편력이 심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기독교 영성훈련의 대가 게리 토마스 교수는 그의 책 “내어드림의 영성”에서 정욕의 몇 가지 뿌리에 대해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1] 그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는 ‘친밀함에 대한 갈망’입니다. 어린이들은 부모에게서 친밀한 사랑을 흡족히 받기를 갈망합니다. 청소년들은 친구와의 친밀한 우정을 갈망합니다. 성인이 되면 인간은 누구나 마음과 몸을 서로 연합할만큼 깊은 친밀함을 나눌 대상을 찾습니다. 이런 기대를 가지고 남녀가 만나 결혼을 하지요. 그런데 이 불완전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친밀함을 필요한만큼 충분히 누리지 못합니다. 많은 아이들이 아빠 혹은 엄마와 보내는 친밀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친밀함 결핍으로 외로워합니다. 심지어 결혼한 부부들도 각각 외로워하다가 다른 곳에서 친밀함을 찾아보고자 하고, 결국 불륜에 빠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친밀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서로 노력해야할 뿐 아니라 서로 책임을 지고자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책임과 수고가 필요없이도 손쉽게 친밀함을 누릴 수 있다는 광고가 널려있습니다. TV 나 인터넷을 들여다 보면 이런 싸구려 친밀함들이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쌓여 있습니다.

본문에 등장한 가련한 여인은 한 남자를 만나 하루밤을 함께 보냈습니다. 우리는 그녀가 왜 그런 불륜에 빠졌는지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녀도 친밀함을 찾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을 지지 않고 즉석에서 친밀함을 사고자 했을 때 그녀가 지불할 댓가는 무서웠습니다. 3 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그녀는 불륜의 현장에서 체포되어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으로 끌려왔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여인을 고소하며 목소리를 높입니다.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4-5) 여인이 지금 서 있는 곳은 성전입니다. 전 지구상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가장 뚜렷하게 약속된 곳입니다.

사람들은 죄책감이 있을 때 가능하면 하나님을 피하여 숨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성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언젠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에 서야함을 알려줍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고후 5:10) 예수님은 즉각 대답을 하시지 않고 땅에 무엇을 쓰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독촉합니다. 그 때 주님이 일어나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7b) 예수님은 평소에 사랑과 용서에 대해 많은 강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분명히 돌을 들어 여인을 치라하십니다. 여인을 정죄하시고 사형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분명히 다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에 상상치 못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9) 성전에 모였던 종교지도자들을 포함한 사람들은 양심에 찔려서 차례차례 그 자리를 떠납니다.
이제 문제의 여인과 예수님만 남아 있습니다. 주님이 묻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0b) 여인이 대답합니다. “주여, 없나이다.” (11a) 이에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1b)

예수님은 여인을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정해주십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사람들은 주님의 이와같은 용서를 듣기 좋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주신 새로운 삶에 대한 이와같은 명령입니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이 말씀 앞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죄와 싸워 본 사람들은 ‘정욕 (lust)’이 얼마나 겨루기 힘든 야수인지 알기 때문입니다.”주님, 과연 성적인 죄를 짓지 않는 순결한 삶이 가능할까요? 너무 어려운 것 같아요. 자신이 없어요.” 이런 고백이 절로 나옵니다.

북미 사회에서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하나의 취향이요 선택으로 전락했습니다. 미국판 아버지 학교 (Promise Keepers) 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참석자들의 65 %가 정욕이 자신의 가장 큰 싸움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단은 정욕이라는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독이 든 무기로 우리의 안방까지 폭격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골프선수가 넘어졌으며, 미국의 대통령이 넘어졌으며, 적은 숫자이기는 해도 유명한 목사님들까지 넘어졌습니다. 우리가 정욕에 패배한다면 그 결과는 혹독할 것입니다. 성전으로 끌려와 사람들 앞에 섰던 이 가련한 여인과 다를 바 없는 결과가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따라서 정욕문제를 올바로 이해하고 다루는 것은 크리스찬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과제입니다. 감사한 것은 이런 부분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섬세히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요한복음 말씀은 정욕이라는 이 거친 야수를 어떻게 싸워 물리칠 수 있는지에 대해 몇 가지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첫째, 죽음을 실제로 겪은 자만이 정욕을 이길 힘을 얻습니다. 요한복음 8:1-11의 사건을 이 여인의 입장에서 살펴볼까요? 그날 이른 아침 여인은 현장에서 붙잡혀 성전으로 끌려왔습니다. 간음죄는 사형이라는 하나님의 법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녀에게 사형을 언도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7b) 여인은 죽음의 문턱에 섰습니다. 이제 몇 초 후면 수많은 돌들이 날아와 그녀를 무참히 쓰러뜨릴 것입니다. 이 짧은 순간에 과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녀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았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준엄한 심판이 있다는 (히 9:27) 말씀을 그대로 체험하였습니다. 사람은 머리로는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아주 먼 미래의 일이므로 무시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성령님은 성경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가 죽는 존재임을 일깨웁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4, 현대어 성경) 몬트리얼에 가을이 짙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곧 겨울이 다가옵니다. 퀘백주에 반드시 겨울이 오듯이, 우리의 인생에도 겨울이 옵니다. 끝이 옵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것이 언제일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는 존재”임을 깊이 깨달을 때, 정욕을 물리칠 힘을 얻습니다. 더 이상 부끄러운 욕심에 이끌려 살지 않고 순결한 삶을 추구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만큼 정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 (11b) 주님은 범죄한 여인을 아무 근거 없이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여인을 대신하여 얻어 맞고 저주를 당한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첫째 메시지는 “죄의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라!” 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이처럼 싫어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죄의 무서운 결과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신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서 부정한 육신의 소원은 떠나갑니다.

셋째, 주님의 용서를 받아들인 자가 정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인생에는 이미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않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1b) 용서에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용서를 그대로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변합니다. 죄를 물리치고 순결한 삶을 살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죄에 넘어지는 큰 이유가 바로 제대로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용서가 주는 감격과 기쁨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염소나 황소의 피와 암송아지의 재를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려도, 그 육체가 깨끗하여져서, 그들이 거룩하게 되거든,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히 9:13-14, 새번역) 저는 겉으로는 도덕적인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죄많은 여인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용서를 깊이 체험하면서 저의 내면이 달라졌습니다. 죄를 물리칠 힘을 얻었습니다.
‘성’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소중한 선물입니다. 주님은 이 선물을 결혼이라는 울타리 안에 허락하셨습니다. 사단은 결혼과 성을 분리시킵니다. 책임과 성을 분리시킵니다. 책임 따위에는 신경쓰지 않고도 성을 즐길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속임수에 당하고 있습니다.

성적인 죄는 다른 죄에 비하여 훨씬 죄책감이 무겁고, 길고 고통스러운 후유증을 남깁니다. 정욕과 관련하여 혹시 우리 속에 정죄감이 남아있다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진지하게 들어야 합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1b) 주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 용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않는 순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여인 곁에서 용서를 선포하셨던 예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순결하고 자유로운 삶으로 인도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1b)

[1] 게리 토마스, “내어드림의 영성”, CUP 번역,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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