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눈물 (The Tears of the King)

Pastor Jihyun D. Yi, Jan 25, 2015

누가복음 19:41-44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38)

기원전 10 세기 무렵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통일하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긴 이후, 이 거룩한 도시는 줄곧 이스라엘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있었고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키우신 후 그들을 통해 세계 만민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출 19:5-6). 그런데 AD 70 년 바로 이 도시가 로마 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는예상치 못했던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제국은 BC 63 년부터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지만 많은 자율권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를 허용하였고,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은 일체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을 건드리면 목숨을 내놓고 저항한다는 것을 로마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AD 66 년에 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바쳐야 하는 세금이 밀리자 로마 총독 플로루스(Florus)는 성전에 바쳐진 헌금 가운데 17 달란트 (약 583 kg) 의 금을 몰수해 세금으로 가져가 버렸습니다. 세금도 제대로 내지 못하면서 성전에는 웬 금이 그렇게 많았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밖 외국에 사는 유대인들이 본국에 사는 유대인들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이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매년 세 차례 성전을 방문하여 바치는 십일조의 액수가 대단했기 때문에 성전의 재정은 윤택했던 것이지요. [1]

로마가 성전의 헌금에 손대자 유대인들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은 이스라엘과 로마제국과의 전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AD 70 베스파시아누스 (Vespasian) 황제는 친아들 티투스 (Titus) 장군에게 이 전쟁을 맡겼습니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토성까지 쌓으며 강공을 퍼부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성은 5 개월만에 함락되었지요. 당시에 일어난 일은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현장을 직접 보며 기록한 “유대인 전쟁사”에 세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성 내부로 진입한 로마군은 분노에 차서 닥치는대로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유월절을 맞아 외국에서 방문한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까지 들어와 있었기에 피해는 더 컸습니다. 더 이상 죽일 사람이 없자 로마군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성전과 도시 전체를 파괴했습니다. 건물을 무너뜨리는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땅을 파서 그 기초까지 다 흩어버렸습니다. 예루살렘이 본래 얼마나 크고 번영한 도시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성벽의 일부만 남겼습니다.[2] 왜 예루살렘이 이처럼 철저히 파괴되었을까요?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예루살렘의 멸망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약 40 년 전에 그리스도에 의해 여러 차례 예언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당신이 만민의 구원자시요 왕이심을 선포하십니다. 제자들은 큰 기쁨 가운데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38) 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왕으로 맞아 들입니다. 하지만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분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39). 여기서 예수님은 예상치 않았던 반응을 보이십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1) 주님은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십니다. 여기서 ‘울다’는 것은 탄식하며 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매우 강인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신 적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주님이 지금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십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2)

평화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견딜만 한 것이 아니지요. 평화가 없는 곳에는 전쟁과 두려움과 불안만 남아 있습니다. 전쟁을 겪어 본 사람은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 뼈져리게 깨닫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작은 전쟁이 일어나 평화가 깨어질 때도 우리는 고통을 당합니다. 제가 가끔 사소한 문제로 제 아내와 다투고 평화에 금이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괴로워하다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백기를 듭니다. 친한 관계일수록 그 사이에 평화가 깨어질 경우 따르는 고통이 더 크지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평화는 바로 “하나님과의 평화”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가 깨어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대로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었습니다 (롬 5:10). 창조주와 원수 관계에 놓여 있는 이상 원하는 것을 다가져도 또 원하는 것을 다 해 보아도 진정한 평화는 얻을 수 없지요. 먼저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 중요한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5:1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 (평화)를 누리자” 내가 불의한 자 곧 죄인임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일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게 주시고자 한 것도 바로 이 평화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이 몸소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런 평화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으니 “평화의 왕”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평화를 얻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평화의 왕을 배척한 이후 예루살렘은 그 이름에 “평화 (salem)” 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평화와는 거리가 먼 도시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눈물의 탄식이 이어집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43-44) 날이 이르면 적들이 몰려와 토둔을 쌓고 예루살렘을 포위할 것입니다. 성을 함락시킨 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멸할 것입니다. 심지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예언은 요세푸스가 기록한대로 그때로부터 40 여년 후 성취되었지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로마 병사들이 건물과 성벽의 기초까지 파헤쳐 흩어 버렸기 때문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는 예언은 무섭도록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거민들을 향하여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이니라” 하시며 슬퍼하십니다.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이란 “주님이 그들을 방문하신 날”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가 직접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기를 거부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다가올 멸망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멸망의 원인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거절했기 때문에 이 죄악에 대한 댓가로 로마에 멸망한 것이다” 라고 한다면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이 보다 정확히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미 멸망을 향하여 달려가던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내미신 구원의 손길을 거절했기 때문에 멸망을 피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많은 특권을 받았습니다. 성전이 그 도시 한 가운데 있었고 원하면 날마다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었습니다. 때를 따라 성경을 듣고 그에 대한 강론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루살렘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을 잃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그들은 거룩한 성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실상은 죄악을 따라 살며 하나님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기를 거절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멸망을 피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예외없이 파멸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이미 파멸 속에 있습니다. 로마서 3:10-17 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파멸은 여러 모습으로 이미 사람들 곁에 찾아와 있습니다. 아무도 외로움을 피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죄책감을 피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사고를 피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질병을 피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노쇠함을 피하지 못합니다. 아무도 죽음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눅 1:79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라고 묘사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이 어둠과 죽음의 그들에 앉아 있으며 그대로 가면 파멸을 피하지 못함을 깨닫고 겸손히 예수님께로 옵니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자신이 파멸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혹시 인정하더라도 예수님을 찾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십니다. 그 결과가 너무 무섭기 때문입니다.

눈물이 주는 희망

그리스도는 예루살렘 거민들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하였습니다. 주님이 그들을 향해 탄식하시며 말씀하셨지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이니라.” (44b) 자신들이 파멸 속에 있는지도 모르고 구원의 손길을 거부하는 그들은 너무도 마음이 굳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을 보시며 그리스도는 우셨습니다. 이천여 년 전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던 그리스도는 오늘도 사람들을 방문하십니다. 주님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방문하시는 가장 보편적이고 확실한 방법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므로 규칙적으로 예배에 참석해 말씀을 듣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사람들을 방문하시기도 합니다.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얼음판에 넘어져 발목을 다치기도 하고, 시험에 실패하기도 하고, 자동차 사고를 당하기도 하고,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나에게 찾아온 모든 어려움이 나의 죄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어려움 앞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바를 깨닫고자 겸손해야 합니다. 이런 어려움들을 속에는 때로 주님의 편지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바로 너의 왕이란다. 이제 나에게 문을 열어 주렴.” “얘야, 지금 너는 죄에 빠져 있단다. 회개하거라.” “나를 섬기는 일에 게을러서야 되겠니?” “얘야, 낙심하지 말거라.” ” 두려워 말고 앞으로 나가렴” 그것은 주님을 영접하라는 초청일수도 있고, 책망일수도 있고 격려일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방문을 거절한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1) 불과 닷새 후면 십자가에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시고 당신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절망이 아닌 희망을 봅니다. 사람들은 그토록 왕을 거절하지만 왕은 그들을 미워하거나 무정하게 대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우십니다. 이제 곧 왕은 그들을 위해 눈물만 아니라 피까지도 흘리실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진심으로 우셨던 예수님, 그 피까지 아낌없이 흘리셨던 예수님, 이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평화의 왕이십니다.

[1] 성경과 고대 전쟁, 조병호, 통독원 2011, p. 218.

[2] Josephus, F., & Whiston, W. (1987). The works of Josephus: complete and unabridged. Peabody: Hendrick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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