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최고의 사업 (II) The Best Business in My Life (II)

Pastor Jihyun D. Yi, Jan 11, 2015

누가복음 19:11-27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13)

예수님이 들려 주신 ‘므나 비유’에는 세 그룹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째 그룹은 귀인이 왕이 되기를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귀인의 백성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미워하였습니다. 둘째 그룹은 므나와 함께 장사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를 무시하고 지낸 사람들입니다. 셋째 그룹은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는 귀인의 명령을 받아들이고 받은 므나를 가지고 충성스럽게 장사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오늘날 지구상에서 한 번이라도 복음을 전해 들은 사람들을 세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첫째, 복음을 들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둘째,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가 자신들에게 맡기시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셋째, 교회 공동체에 들어와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맡기시는 일의 가치를 알고 정성스럽게 그 일을 하는 사람들. 여기에 모인 우리 각 사람도 이 세 그룹 가운데 한 곳에 속해 있습니다. “내가 어떤 그룹에 속해 있는냐?”에 따라 나의 오늘의 행복이 결정됩니다. 내 삶의 열매가 좌우됩니다. 나아가 내 영원한 운명이 달라집니다. 먼저 비유에 나오는 세 그룹의 사람들의 특징을 각각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 왕을 거절하는 사람들

비유에서 귀인은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그런데 그의 백성들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 (14) 그들은 귀인 소유의 땅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공식적으로 귀인은 그들의 주인이며 그들은 귀인의 백성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귀인을 미워합니다. 귀인이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무슨 수를 써라라도 귀인이 왕 위에 오르는 것을 막고자합니다. 그래서 사절단을 만들어 먼나라로 파견하였고 이러한 탄원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예수님에게 이 비유를 들으면서 사람들은 그때로부터 약 30 여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헤롯 대왕은 죽으면서 유대 지역을 그의 아들 아켈라오 (Archelaus) 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정식으로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는 로마의 인준을 받아야 했기에 아켈라오는 로마로 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켈라오가 그들의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50 명이나 되는 사절단을 로마로 파견하여 아우구스투스 (Augustus) 황제에게 직접 청원을 올렸습니다. 이에 황제는 아켈라오에게 유대 지역을 다스릴 권한을 주었지만 ‘왕’의 칭호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1] 사실 아켈라오는 매우 잔인하고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반란을 진압한다며 3,000 명을 거침없이 살해하기도 하였습니다.[2]

비유에 등장하는 귀인은 아켈라오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고결한 (noble)’ 사람이며 충분한 왕의 자질을 가진 훌륭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백성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고 필사적으로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방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만민의 ‘왕’이 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눅 2:32-33).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풍랑을 순식간에 잠재울 수 있는 전능한 왕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을 목숨을 내어 놓으신 사랑의 왕이십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비유 속의 백성과 같이 예수님이 자신들의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당신의 왕으로 모셔들이시겠습니까?” 라고 물으면 주저하거나 난색을 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싫어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권위에 대한 반발”입니다. 유대인들은 아켈라오의 권위에 반발했습니다. 이 경우는 반발할 만한 근거가 있지요. 비유 속의 백성들도 귀인의 권위에 반발했습니다. 이 경우는 반발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귀인은 훌륭한 왕이 되어 그들을 평화로 다스릴 것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은 반발합니다. 악한 왕의 통치 아래서 고통당한 사람들은 권위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게 되지요. 권위적인 부모님 밑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들도 윗 사람을 어려워하며 권위에 반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만일 우리 마음 속에 이러한 “권위에 대한 반발”이 숨겨져 있다면 이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는 데 상당한 장애물이 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잠시 도와 주었던 한 청년은 아버지에 대한 심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어른이 되는 것이 싫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른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이 청년은 교회에서 ‘순종’이라는 말을 들으면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 청년이 오랫 동안 예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을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조금만 살펴보아도 이분은 우리가 신뢰할 만한 겸손한 왕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 사건에서 예수님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공식적으로 입성하시면서 의도적으로 “나귀 새끼”를 타셨지요. 예수님이 겸손한 분이시묘 평강의 왕이시라는 증거가 분명한대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분을 거부한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태양을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들어간 식물처럼 결국 말라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에 반발하여 타락한 천사, 곧 사단과 같은 편이 되어 영원한 멸망을 피하지 못합니다 (27).

둘째, 왕에게 무관심한 종들

귀인은 열 명의 종들에게 각각 한 므나를 맡기고 이렇게 말했지요.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13) 왕이 된 귀인은 약속대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종들이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불렀습니다. 종들 가운데 한 사람이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20) 다른 종들은 맡겨주신 은화를 사용하여 열심히 사업을 하였고 주인이 인정하는 수익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종은 은화를 수건에 싸두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21) 그는 주인이 ‘냉혹한 (harsh)’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주인을 무서워한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주인이 어떤 분인지 잘못 알고 있습니다. 주인은 사실 왕위를 받으러 가서 그를 포함한 세상 만민을 살리기 위해 대신 목숨을 내어 놓았습니다. 이런 분을 어떻게 냉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그는 주인이 심지 않은 것을 거두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불평합니다. 주인이 자신을 붙잡아 억지로 일을 시킨다는 근거없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이 종은 인생을 허비하였습니다. 주신 재능과 시간을 유익한 곳에 사용하지 못하고 낭비하였습니다. 왕은 그를 이렇게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악한 종아!” (22)

불행히도 오늘날 교회 안에는 이 종과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에 다니지만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며, 예수님에 대해 여러가지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붙잡히면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주님의 일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재능을 맡겨 주셔도 그 재능으로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는 무관심합니다. 재산을 주셔도 그 재산으로 복음을 전하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직장을 주셔도 그 직장을 통해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데는 무관심합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결국 인생을 허비할 수 밖에 없습니다.

셋째, 왕에게 충성하는 종들

이제 세번째 그룹의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왕이 돌아왔을 때 한 종이 나아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16) 이에 왕이 대답하였습니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17). 왕은 그 종을 “착한 종 (my good servant)”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 사실을 기뻐하며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열 개의 도시를 다스리는 권세를 상급으로 주었습니다. 열 므나는 약 10만 달러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이에 비하여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상급이지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다는 사실”은 이 사람이 왕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며 존경하고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는 왕의 명령을 깊이 받아들였음을 보여줍니다. 주님은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도시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지요. 이 사람도 역시 왕에게 충성하여 열심히 살았고 자신이 이룬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상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돌아오십니다. 그 전에 우리의 삶이 끝나 그분에게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재능과 재산과 시간을 어디에 투자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한 므나를 받았습니다. 단 한 번의 인생입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혹시 이기심이나 야망에 투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 일락에 투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1960 년대에 청소년이었던 필립 얀시와 그의 형은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조지아 주에서 살았습니다. 이 형제들이 다녔던 교회는 아주 폐쇄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고 인종차별을 지지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받은 필립과 그의 형은 교회를 떠나고자 하는 강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형은 탕자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작은 아들과 같이 교회를 떠나 여러 사상과 종교들을 옷을 갈아입듯 바꾸며 경험했습니다. 그러다가 “꽃의 자녀들”이란 집단에 들어가 공동생활을 하며 성적 문란함과 마약에 빠졌습니다. 형은 모든 식구들과 관계를 끊고 지냈으며 몇 차례의 결혼생활도 파경을 맞았습니다. 필립은 나중에 형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보다 풍부한 음악적 재능을 가진 한 인간이 콘서트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연주하기보다는 그저 조율만 하다가 삶을 마감했던 것이다. 아무런 대안 없이 신앙을 내팽개치는 행위가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가지는지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3]

형과는 달리 필립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며 교회를 떠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러한 그를 주님은 십여 명의 사람들을 통해 섬세히 도와주셨습니다. 그 사람들은 필립이 직접 만났거나 책을 통해 만난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C. S. 루이스, G. K. 체스터턴, 폴 브랜드, 애니 딜라드, 헨리 나우웬과 같은 사람들의 글과 생애를 지켜보면서 필립은 자신의 므나를 사용하여 주님이 인정하시는 열매를 맺고자 인생의 방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그는 ‘글솜씨’라는 재능으로 사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바쳐 30 권에 달하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들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의 갈등에서 벗어나 치유받고 성장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13)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고 순종한 사람입니다. 규모나 모양을 다를지라도 우리 또한 이 말씀대로 살아갈 때에 그가 맺은 열매와 유사한 값지고 영원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1] W. W. Wiersbe, The Bible exposition commentary, Vol. 1, p. 253 (1996), Wheaton, IL: Victor Books.

[2] W. A. Elwell & B. J. Beitzel, Baker encyclopedia of the Bible. (1988) Grand Rapids, MI: Baker Book House.

[3] “그들이 나를 살렸네”, 필립 얀시, 최종훈 & 홍종락 옮김, 포이에마, 2013, p. 9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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