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더니 (Every Day He Was Teaching at the Temple)

Pastor Jihyun D. Yi, Feb 1, 2015

누가복음 19:45-48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그를 죽이려고 꾀하되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였더라.” (47-48)

유월절 축제가 닷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큰 무리의 사람들이 명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요 12:12). 이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당신이 평화의 왕, 곧 메시야이심을 드러내시며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날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이튿날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사흘 후 목요일 밤이 되면 예수님은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체포당하시고, 금요일 아침에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곧바로 십자가에 달리실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수차례 제자들에게 예언하셨지요. 다시 말해 주님은 당신이 돌아가시기 전까지 단 나흘이 남아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그 나흘의 시간을 무엇에 사용하셨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그리스도

주님은 성전으로 가십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5) 성전에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상인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사용되는 동물들을 팝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성전 근처에서 동물을 구할 수 있으면 편리하지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장사꾼들은 성전 뜰, 곧 이방인의 뜰에다가 동물들을 진열해 놓고 팝니다. 또한 하나님께 드리는 동물은 흠이 없어야 합니다. 다리는 절거나 병든 것은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상인들에게는 더 기회가 많은 셈이지요. “제사장이 공인한 비둘기 팝니다.” “제사장이 거부할 확률 0 % 인 번제용 양 팝니다” 이렇게 광고하는 상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대담하게 광고하는 상인들도 있지 않았을까요? “하나님께 확실히 열납되는 흠없는 소 팝니다”. 먼 곳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제사용 동물을 파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상거래가 성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인들이 성전 안에서 장사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성전의 책임자인 제사장들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학자들에 따르면 제사장들은 상인들에게 상당한 커미션을 받았다고 합니다.[1]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십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왜 이런 과격한 행동을 하실까요? 주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46)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두 구절을 인용하시며 당신이 상인들을 내쫓으시는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첫째,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56:7에 기록되어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외국인들도 구원에 초청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유대인들은 성전을 자신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곳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누구나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집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목적은 만민을 구원하셔서 그들과 교제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7:11절에 기록되어 있지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유대인 지도자들은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강도는 폭행이나 협박 따위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도둑을 일컫지요. 예수님이 보실 때 성전에서 영업하는 상인들은 제사장들과 한편이 되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러한 비극은 예레미야 시대에도 일어났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외국인 근로자들, 고아들, 과부들과 같은 사회의 약자들을 압제하였습니다. 심지어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우상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에 와서는 “우리는 안전하다 (We are safe)” 라고 말했습니다. (렘 7:1-10) 그들은 성전을 미신적으로 들락거렸습니다. 탐욕을 따라 지극히 이기적으로 살아가면서도 “안전”을 보장 받기 위해 성전에 왔습니다. 성전에서 규칙적으로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안전”을 하사 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렘 7:11)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시며 상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신 것이지요. 세상이 다 부패해도 성전이 살아 있으면 희망이 있습니다. 성전은 타락한 세상에 생명수를 흘려보내는 샘물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만나고 거룩한 성도로 변화될 것이며, 결국 이 성전 때문에 세상은 거룩한 땅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장사하는 집” 곧 마켓으로 변했습니다. 마켓은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거래를 하는 곳입니다. 마켓 자체는 인간에게 유용한 것입니다. 문제는 성전이 마켓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에 있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분노하시며 성전을 정화하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많은 부분에 있어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성전은 그 역할을 다하고 뒤로 물러났지요. 이제 누구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예배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부르지요. 초대 교회가 세워진 이후로 교회는 성전이 이루지 못했던 중요한 역할을 물려 받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의 역할입니다. 이사야 56:7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교회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며, 또한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이 타락했던 것처럼 교회도 타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탄이 쓰는 전략을 보면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직접 공격하기 보다는 우회적인 작전을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회가 마켓으로 변질되게 하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과 거래(deal)를 하고자 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거래이지요: “주님, 제가 주일도 지키고 헌금도 하니까 그동안 제가 잘못한 것을 없던 일로 해 주세요.” “주님, 제가 열심히 봉사할 테니 시험에서 합격하도록 도와 주세요.” “주님, 제가 주일에는 열심히 교회에 오겠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엿새 동안은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제가 원하는대로 하고 싶어요.” 잘못하면 우리는 기독교의 소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쇼핑하듯이 교회에 와서 어느 정도 댓가를 지불하고 필요한 것을 구입하고자 하기 쉽습니다. 약간의 봉사와 헌금을 지불하고 마음에 평안와 위로, 삶의 지혜, 좋은 인맥과 같은 것들을 사 가고자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와 ‘거래’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거래를 하기 원하셨다면 우리의 인생은 이미 파산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갚은 수 없는 천문학적인 액수의 빚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이 빚을 모두 갚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래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은혜”의 대상으로 여기십니다. 교회에 올 때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주님과 거래하고자 했다면 이를 회개하고 기도로 그분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분의 마음을 따라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참으로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교제하며 나아가 다른이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에서 날마다 가르치시는 그리스도

성전을 정화하신 후 예수님은 그곳에서 무엇을 하십니까?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니…” (47)주님은 백성을 가르치십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내용이 무엇일까요? 그 가운데 일부가 눅 20-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포도원 소작인들의 비유, 시이저에게 세금을 바치는 문제, 부활과 결혼에 대하여, 한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과 당신의 재림에 대하여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비뚤어진 마음, 곧 죄에 대해 깨닫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한없이 크신 사랑에 대해 눈뜨게 해 줍니다. 장차 신자들에게 일어날 부활이 얼마나 분명한 사실이며 큰 소망이 되는지 알려 줍니다. 바른 세계관을 가지고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고대하며 성실하게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누가 우리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성전을 정화하신 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더욱 미워하여 제거하고자 합니다. 긴장이 고조됩니다. 다만 그들은 백성이 두려워 당장 주님을 해치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마지막 나흘 동안 주님은 매일 이렇게 당신에게 배우고자 나아온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심지어 당신을 죽이고자 기회를 엿보는 권력자들까지도 품고 그들에게도 말씀을 들려 주십니다.

저는 이러한 예수님을 보면서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생각났습니다. 다카시 박사는 나가사키 의과대학에 교수로 재직하면서 방사선을 이용하여 질병을 치료하는 분야에 많은 공로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세계 2 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5 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그는 부인을 잃었고 자신은 원폭 피해자가 되어 시한부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아직 어린 두 자녀가 있었습니다. 전쟁으로 엄마를 잃은 아이들이 이제 얼마 안 있어 아빠마저 떠나보내고 고아가 될 것을 생각할 때 다카시 박사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졌습니다.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아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글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아이들을 남기고”, “사랑하는 아이들아” 와 같은 글들이 그의 두 아이들에게 전해졌고 출판을 통해 수많은 온 일본을 감동시켰습니다. [2] 시한부 선고를 받은 다카시 교수가 자신의 두 아이들을 사랑한 것 이상으로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나흘을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데에 온전히 사용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주님의 열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듣습니까? “백성이 다 그에게 귀를 기울여 들으므로…” (48a) 성전에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청종합니다. “모든 백성이 그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가더라.” (21:38)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에 성전에 모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큰 열정을 가지고 말씀을 가르치기 원하십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치유하시고 키우시며 교제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우리는 귀를 기울여 주님의 말씀을 듣습니까? 주의 말씀을 듣기 위해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온 사람들과 같은 갈급함과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 만큼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열정 만큼 우리 인생의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1] Darrell L. Bock, The NIV Application Commentary, Zondervan, Grand Rapids (Michigan), 1996, p. 500.

[2] 아버지의 목소리, 나가이 다카시, 박일화 옮김, 줄과 추,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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