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가족 (The Family of Christ)

Pastor Jihyun D. Yi, Dec 14, 2014

마태복음 1:1-17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

이 이야기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실화입니다. 지중해에서 멀지 않은 어떤 마을에 한 젊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중매를 통해 ‘엘’이라는 청년을 만나 결혼하였습니다. 그런데 신혼의 기쁨을 다 누리기도 전에 남편 엘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는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는 그 지방에서는 과부가 되면 낙오자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자 혼자서는 유산을 물려 받을 수도 없었고, 땅을 소유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녀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습니다. 그 지방의 전통을 따라 남편의 동생 ‘오난’과 다시 결혼하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 오난은 형수와 자기 사이에 아이가 생기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첫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아들은 자기 아들이 아니라 죽은 형의 아들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아들은 죽은 형의 계보를 이을 것이고, 유산도 물려 받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부터가 오난의 아들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오난은 자신의 아내가 된 형수와 동침은 했지만 임신을 피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별안간 오난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때부터 시아버지는 이 며느리를 심히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한 아들이 더 있었지만 결혼시키기에는 아직 어렸습니다. 이를 다행으로 여긴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친정으로 돌려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절하고 내 막내 아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보거라.”

여러 해가 흘렀습니다. 막내 아들은 벌써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시어머니가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아무런 연락도 가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시아버지가 양털을 깎기 위해 그의 양떼를 몰고 그녀가 사는 마을 부근에 온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녀는 창녀처럼 자신을 꾸미고 시아버지가 지나가는 성문으로 가서 앉아 있었습니다. 시아버지는 며느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를 창녀로만 알고 관계를 맺었습니다.

석 달이 지나 이 과부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임신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이 소식은 시아버지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분노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장 그년를 끌어내어 불사르라!” 그녀는 끌려가며 다급히 말했습니다. “이 도장의 주인 때문에 제가 임신했습니다!” 시아버지가 가만히 보니 그것은 자신의 것이었습니다. 화대가 없어 담보물로 그 창녀에게 주었던 것이었습니다. 비로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닫고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몇 달 후 이 여인은 해산하였고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실화는 창세기에 기록된 것으로 유다와 그 며느리 다말 사이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집안에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숨기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 성경에는 이 사건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38장).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 1장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여인의 이름이 바로 다말입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3) 이 짧은 한 구절 속에서 우리는 연약한 여인으로서 살아남고자 발버둥쳤던 다말의 애절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시아버지를 끔찍한 곤경에 빠뜨리면서까지도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어 낸 죄인 다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의 서두에서 저자 마태는 나사렛 예수의 족보를 언급하며 이분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대개 사람들이 족보를 기록할 때는 자랑스러운 인물은 부각시키고 부끄러운 인물은 감추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마태는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과의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은 것과 같이 낮뜨거운 사건들을 오히려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첫째,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철저히 죄로 얼룩져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다말은 입에 올리기도 부끄러운 죄를 저질렀습니다. 남자들의 죄는 더 하지요. 시아버지 유다는 어떠합니까? 그는 아내를 사별한 직후 창녀를 찾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며느리가 정조를 지키지 못하고 임신하자 간음을 행한 것으로 판단하고는 “그를 이끌어 내어 불사르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창 38:24) 다윗 왕은 시편의 절반을 기록하였으며 하나님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다윗도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자신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덮을 수만 있다면 그는 자신의 과거에서 바로 이 사건을 덮어 버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다윗의 이름과 함께 바로 이 사건을 언급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6b) 이와같이 예수님의 족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얼마나 죄인인지, 그리고 죄로 인해 얼마나 망가져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사렛 예수의 조상일지라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둘째, 죄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구원자를 보내실 계획을 오래 전부터 세우셨습니다. 이 구원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구원자를 이 땅에 보내기 위해서는 한 가문을 택해야 했습니다. 이런 중요한 일에 어찌 아무 가문이나 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흠없이 살아온 훌륭한 가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택하신 가문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 유다 지파였습니다. 며느리를 창녀로 알고 동침했던 바로 그 유다의 후손들입니다. 마태복음 1 장에 나와 있는 족보를 보면 이 가문에는 가끔 훌륭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죄와 허물로 점철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택하셔서 회개로 이끄셨고 치유하셨습니다. 마침내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기까지 이들을 키우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죄인들에게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마태는 메시야의 족보를 열어 보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1) 여기서 ‘계보’라는 단어는 ‘가족’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족보는 그분의 가족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와 다말과 같이 부끄러운 죄인들도 회개할 때 얼마든지 그리스도의 가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아버지로 인하여 쌍둥이를 낳은 이후 다말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자녀들을 잘 길렀고 후세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룻기 4:12). 하나님 안에서 다말의 삶이 아름답게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다는 들나귀처럼 거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이복 동생 요셉을 노예상인에게 팔아넘기는 것을 주도할만큼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3 년이 흐른 후에는 이복 동생 베냐민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이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자처하였습니다 (창 44:33). 주님의 간섭을 받아들이면서 유다가 점점 성숙한 영적 사람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또 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여인의 이야기를 구약성경에서 살펴보겠습니다. 한 유대인 부부가 작지만 유서 깊은 마을에서 조그만 땅을 일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방에 심각한 흉년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먹고살 길이 없다고 판단한 그들은 두 아들을 데리고 옆 나라 모압으로 이민갔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민 생활이 힘들었던지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난한 이민자로 사는 것도 고달픈데 가장까지 잃은 그 집안에 얼마나 어려움이 컸겠습니까? 역경 가운데서도 두 아들은 장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둘 다 모압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가난한 이민자에게 시집 온 두 여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가운데 한 여인의 이름이 룻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자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 집안에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날까요? 과부 시어머니와 이제 막 과부가 된 며느리는 이 질문에 답을 찾지 못합니다.

이무렵 시어머니는 고향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귀향을 결심하였습니다. 룻은 친정으로 돌아가 재혼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한 시어머니를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신앙에 뭔가 끌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고향 모압을 떠나 시어머니를 따라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땅 한 평 남아 있지 않은 시어머니의 옛고향 베들레헴으로 따라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룻은 그곳에서 상상하지 않았던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보아스라는 그 사람은 재산도 있고 덕망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일처럼 나서서 많은 애를 써가며 룻의 시어머니가 잃었던 땅을 다시 찾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축복 가운데 룻은 보아스와 재혼을 하였습니다. 얼마후 룻이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를 품에 안으며 룻과 시어머니는 안개처럼 그들을 덮고 있던 오랜 상처들이 모두 떠나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회복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놀라운 회복이 그들을 감싸 안았던 것입니다 (룻기 1-4).

룻은 누가 보아도 루저 (loser) 였습니다. 가난한 이민자의 집에 시집갔는데 남편이 요절했습니다.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룻의 인생은 땅에 떨어져 산산조각난 그릇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룻이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따르면서부터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보아스’라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만큼 좋은 남편을 선물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룻의 삶은 회복되었습니다. 그 회복이 얼마나 컸던지 시어머니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까지 덩달아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다윗 왕의 증조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이 오르게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5b) 룻이라는 이름은 우리 인생이 결코 역경을 피해갈 수 없음을 상기시킵니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원치 않는 일을 만날 수 있고 상처받고 깨어질 수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선택했을 때 룻의 인생이 회복되었음도 상기시켜 줍니다. 이 회복은 잃었던 것을 다시 찾는 수학적인 원상복구를 넘어서서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크고 놀라운 회복입니다. 하나님을 따를 때 누구나 이런 회복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가족이)라” (1).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기 위해 선택된 약 48 명의 사람들, 이들을 살펴보면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가족’이라는 영광스러운 특권을 얻을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1] 룻과 같이 세상에서 낙오하고 깨어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유다나 다말과 같이 죄로 얼룩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약속대로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면 그분의 실제 ‘가족’이 될 수 있습니다. 그분과 연결되어 하늘의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이천 여 년 동안 나라와 시대를 넘어 하늘에 구름과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 놀라운 일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가 룻처럼 결심하고 당신을 따라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유다처럼 회개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이 당신의 가족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1] 마태복음 1 장의 족보에는 의도적으로 생략된 이름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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